포항 지진이 많이 억울한(?) '이명박'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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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 때 지열 발전을 시작한 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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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자태로 해변가를 뛰어가는 '린다 카터' 공주 - 원더우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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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만 놓고 봐도 왜 파라다이스인지 알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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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우' 화백의 표지그림이 돋보이는, 발명/발견사전(금성 출판사) - 1981년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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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 퍼플레인(라이브 공연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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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21일 프린스(Prince Rogers Nelson)가 세상을 떠났다. 영원히 젊음의 왕자의 모습으로 기타를 애무하며 노래할 줄 알았던 그가 떠났다는 소식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소식을 접한지 얼마 되지 않아얄궃게도 나와 팝 음악을 줄곧 공유하던 여자아이로부터 그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문자를 받고서, 난 다시금 멍해졌다.

우리는 가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소중함을 모른다고들 한다. 나 또한 프린스가 떠나고나서야 그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뮤지션이었는지 상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지속되었던 슬픔의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가고 나서는, 조금 더 이성적으로, 왜 내가 그토록 그의 음악에 열광해왔던가 라는 물음에 대한 고찰을 조금씩 해보게 되었다.

프린스의 음악을 처음 접한건 아마 중학교 때 였음이 명징하다. 2 쯤이였던가, 중간고사를 망치고 우울한 마음에 <Private Joy>를 들은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우울한 기분에 훵키하면서도 동시에 다크한 사운드, 은밀한 즐거움을 갈구한다는 가사가 어우러져 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시절의 나는 프린스의 정규앨범 중에서 상대적으로저평가 받는 <Controversy> <Around the World in a Day> 같은 앨범에 열광했던 것 같다. 나중에 이 두 앨범에 대해서도 좀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길 희망한다.

3, 5, 10 따위의 순위와 서열을 매기는 행위는 어찌보면 좀 유치하고 미성숙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음악, 영화와 같은 분야에 있어서 서로 매긴 순위를 비교해보고, 거기에 대한 담론을 가져가 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 본능적 재미가 아니겠는가.

나의 페이보릿 솔로 뮤지션 탑3 혹은 탑5 안에 너끈하게 들어갈 프린스, 데이빗 보위(David Bowie)2016년에 사망한 사건은 그래서 나에게 더욱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왜 그토록 프린스의 음악에 열광했던 것일까? 이 명제는 그간 쌓아온 나의 음악 취향과 어느 정도의 마찰을 일으키며 더욱 특별한 물음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도 흑인 음악을 좋아한다.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 개척해 낸 드넓은 소울과 훵크의 영토 아래 천연의 리듬감을 내재한 수많은 훌륭한 훵크 밴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조지 클린톤(George Clinton)의 훵카델릭(Funkadelic) / 팔리아먼트(Parliament),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타워 오브 파워(Tower of Power)의 주술성과 원시성, 집단성은 분명 나의 가슴을 강하게 두드려주었다.

더불어 제임스 브라운과 다른 거대한 한 축에 자리한 재즈의 화신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로큰롤의 시작점인 척 베리(Chuck Berry)와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같은 뮤지션들은 단지 내가 동경했을 뿐 아니라 현대의 대중음악의 토양을 구축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런 구구절절한 전제에도 불구하고, 또한 대중음악을 흑과 백의 이분법적 구조로 나누는게 여러모로무척 시대착오적 발상인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십몇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내 음악 취향이 아무래도 백의 음악쪽에 훨씬 가까움을 인정해야겠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킹 크림슨(King Crimson) EL&P(Emerson Lake & Palmer),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와 메가데스(Megadeth), 보위와 루 리드(Lou Reed), 듀란듀란(DuranDuran)과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그리고 로비 윌리엄스(Robbie Williams)까지. 내가 열성적으로 좋아했던 뮤지션들은 전부 백의 뮤지션이었다.

물론 방금 열거한 뮤지션들의 태반이 흑인음악을 했으며, 흑인음악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레드 제플린은 하울린 울프(Howlin Wolf), 윌리 딕슨(Willie Dixon)의 블루스의 직계 후손이며(차용도 많이 했다), 보위는 “Thin White Duke” 시절 필리 소울(Philly Soul)을 제대로 구사했다.

듀란듀란 또한 흑인음악의 리듬감을 수용했으며, 조지마이클은 블루아이드 소울(Blue-eyed Soul) 계열의 뮤지션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리고 동일하게 좋은 음악을 구사했음에도 시대적 상황, 마케팅의 논리에 따라 자연스레 백인 뮤지션들이 더 수면 위에 오르기 쉽고, 인기를 끌었던 측면이 존재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중간점을 찾아가며 내가 내린 결론은 날 것 그대로의 흑인음악보다는 백인음악의 스트레이트(Straight)함이 결합되거나, 아예 클래시컬 뮤직(Classical Music)의 맥을 잇는 아트록(Art Rock), 프로그레시브록(Progressive Rock)쪽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논리와 근거가 여러모로 부실한 나의 결론은 프린스에 대한 나의 물음에 그럭저럭 답이 되어주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면에서 프린스의 음악이 흑과 백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는 것인가? 나는 지금부터 그의 최고작은 의견이 분분할지라도, “대표작이란 칭호엔 대부분 동의할 1984년작 <Purple Rain>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나가고 싶다.

! 정확히 말하자면 Prince & the Revolution(Wendy Lisa가 소속한 바로 그 밴드 맞다.) <Purple Rain>이며, 동명의 영화의 Ost로 쓰인 사운드트랙 앨범이기도 하다.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241, 2곡의 빌보드 넘버원과 1곡의 넘버투, 그 해 세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 그야말로 84년을 강타한 <Purple Rain>을 중학교 시절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은 간단하게 너무 좋고, 너무 신선하다였다. 그는 어두운 동굴에서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마이클 잭슨과는 또다른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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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 - 퍼플레인(영화속 공연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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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 스톤'의 정신과 '지미 헨드릭스'의 영혼의 매개자였던 '프린스'는 연금술사적 마력으로 “Purple Rain”의 자줏빛을 플래티넘 골드로 바꾸어놓았다. “Purple Rain”은 그에게 가장 큰 성공을 안긴 앨범의 타이틀 곡이었다.

이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1천3백만 장의 매출을 올릴 뿐 아니라, 1984년, '프린스'에게 오스카상 베스트 오리지널 송 스코어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긴다. 이 앨범의 탄생은 ‘더 퍼플 원(The Purple One)’, '프린스'에게 업계 돌파구가 되어주었던 앨범 〈1999〉의 연주 투어에서 유래한다.

Purple Rain〉이전 그의 작품들이 그렇듯 펑크(funk)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더 레볼루션'의 키보드 주자 '매트 핑크'의 말에 따르면, '프린스'가 당시에 같은 도시를 돌며 공연하던 하드 로커 '밥 시거'의 인기에 어리둥절해하며 고민에 빠져 있기에 자신이 '시거' 스타일의 크로스오버 발라드를 써보라고 제안했다 한다.

“이 노래는 기본적으로 볼 때 프린스의 것이라 하는 게 맞죠.” 레볼루션의 기타리스트 '웬디 멜보인'이 보그에 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그녀와 키보드 주자 '리사 콜맨')가 꽤 많이 살을 붙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함께 작업할 것을 격려했고 파트 구성이나 편곡에 관해 요구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4트랙의 멀티트랙 리코딩 기계를 아예 호텔 방에 가져다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프린스'의 대표 곡 중 하나이다. 이것은 후에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대 최고 노래 500선 중 143위에 랭크된다.

이 싱글은 “When Doves Cry”와 “Let’s Go Crazy”와 함께 대서양 양편에서 차트 상위권을 장식했고 미국에서는 골드 앨범으로 등극한다. 이 노래는 1983년 '미니애 폴리스'에서 열린 모금 공연에서 라이브로 녹음되었다. 그러나 앨범에 수록된 것은 전체 11분의 것에서 가사 한 절과 솔로 한 부분을 삭제한 8분 길이의 편집본이다.

그러나 듣는 순간 이 곡임을 알리는, 물결치는 오프닝 기타 사운드는 여지없이 하나의 대서사시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다. 블루지한 기타와 이에 메아리치는 라이브 드럼, 그리고 한없이 소울적인 가사는 감정 복받치는 크레셴도를 쌓아 올리다가 피아노의 반짝임과 현의 슬픔 속으로 희미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앤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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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찰스 >에 출연했던 '완이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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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찰스' 홍석천, JYP에게 러브콜 보내 완이화의 레슨 부탁

방송인 홍석천이 <이웃집 찰스> 녹화 도중 눈물을 펑펑 쏟았다. 카렌족 난민 소녀, 완이화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했기 때문이다.

오는 화요일 방송되는 KBS ‘이웃집 찰스’ 184회에서는 카렌족 난민 소녀완이화 가족이 출연한다.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지대에 사는 소수민족 카렌족은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미얀마 중앙정부의 오랜 핍박과 탄압 때문에 고향을 떠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4년 전, 가족들과 함께 낯선 한국 땅에 정착하게 된 이화는 지난해 우연히 출전하게 된 ‘외국인 가요제’에서 특별상을 받으며 노래 실력을 인정받았다. 남다른 감성으로 애절하게 노래하는 이화의 목소리에는 사실 숨겨진 사연이 있다는데. 바로 이화의 아버지가 카렌족의 유명 가수였던 것. 한국에서 난민으로 사는 이화의 사연이 머나먼 고향 땅에 알려지면서 미얀마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미얀마에서 이화를 초청하는 무대가 마련되기 이르렀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이화는 고민에 빠졌다. 고향 땅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부르는 노래가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기 때문. 힘든 일상 속에서도 늘 웃음 짓던 이화는 급기야 노래 연습 도중 눈물을 흘리고 마는데...

녹화 내내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웃집 찰스>의 패널 홍석천은 이화의 사연을 전해 듣고 눈물을 쏟았고, JYP 박진영에게 러브콜을 보내며 이화의 레슨을 부탁했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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